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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Life2017.01.01 01:00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나이가 들수록 체감하는 시간은 점점 짧아진다고 하지만, 나의 30대는 다른 나머지 3개의 10년에 비교해봐도 가장 길고 많은 일이 있었던 기간이었다. 아홉 수 따위의 얼토당토 않은 미신에 코웃음쳤던 나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2016년, 나의 39살은 결과적으로 정말이지 지독하게 어려운 한 해였다.


삶은 늘 쉽지 않다.  한국 나이로 이제 나는 40대가 되었다. 많은 것을 이루었고, 많은 것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어느 모로 봐도 젊음이라는 관점에서 그 정점을 찍고 내리막에 들어서는 시기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내가 늙어 가는 과정에 들어서는 어떤 분기점에 이른 것이라면, 이제 나는 아름답게 늙고 싶다.





지난 10년을 돌아보기 - 



2006년 11월에 첫 회사를 나와 다시 상경했다. 서울에 올라온 첫 날, 마련한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내려다본 서울에는 눈이 내렸었다. 3년 전부터 계획하고 노력했던 결과였으며 나는 이러한 성취에 상당히 고무됐었다. 세상에 못할 것이 없어 보였다.


2007년 어느날 회사에서 신나게 음악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형을 만났다. 나는 그 형과 함께 매일 밤 재즈 공연을 들으러 홍대를 쏘다녔다. 딴에는 신나게 서울 life를 즐겼다. 여한이 없었다.


2008년 5월, 대학생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나 8년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신혼 생활은 모든 면에서 서툴렀지만 그런 만큼이나 재미있었다. 어떠한 우연과 필연들에 의해, 그리고 당시 상당히 막연한 이유만으로 MBA를 하겠다고 마음 먹게 되었다.


2009년 – 일하랴, TOEFL 공부하랴, 에쎄이 쓰랴 지독하게 시간을 쪼개 썼던 나날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고약하리만치 바쁘고, 밑도 끝도 없이 달리던 나날이었다. 늘 책과 노트북을 들고 도서관과 카페를 다녔다.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이해해 준 와이프가 고맙고 미안했다.


2010년 – 마지막까지도 합격증이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많이 좌절하고 지쳤었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여러 곳을 다녔고, 소소한 장난을 치는 즐거운 시간도 있었다. 많은 것을 배운 경험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처음으로 나의 어떠한 한계를 보게 된 것 같아 깊은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그 와중에도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2011년 2월, 밤사이 미국에서 걸려 온 부재자 통화 기록이 있었다. 다음날 오후 구정 연휴를 맞아 춘천 명동길을 걷다가 해피콜을 받았다. 합격이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내는 울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될 여정의 시작 티켓을 끊은 것이다. 그날로 나와 와이프는 버스를 타고 어렸을 때 살던 대관령 진부에 들렀다. 그날의 기억들이 아직도 또렷하다. 입학 전까지 남은 1년을 맘껏 즐겼다.


2011년 9월, 우여곡절 끝에 회사의 지원을 얻어내어 미국으로 향했다. 강원도 산골에서 자란 생 촌놈이 처음으로 미국에 가서 뉴욕을 거쳐 해노버에 도착했다. 버스가 교정을 한 바퀴 돌고는 터미널에 세우는데 갓 가을에 들어선 해노버와 캠퍼스가 나를 맞이했다. 아름다웠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2012년, 파티와, 케이스와, 밤샘 시험과, 취업 준비 등으로 생애 가장 바쁘고, 힘들고, 멋졌던 한 해를 보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첫 아이 임신을 했고, 7주가 지나 유산을 했다. 우리의 첫 아이는 성별도 모른 채 어느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2012년 여름, 체감 온도가 50도를 넘나드는 오클라호마 풍력 발전 프로젝트에, 온통 축제 분위기인 핀란드에서의 인턴십을 거쳐, 가을에는 스페인에서 교환학생을 보냈다. 가방에는 학교 과제인 케이스를 넣고 유럽 방방 곡곡을 돌아다녔다. 가장 행복한 국가인 핀란드에서의 생활은 꽤나 이색적이었고 또 멋졌다. 스페인은 낭만적이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사막에서의 밤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2013년 졸업과 함게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가지 말라는 듯 늦은 해노버의 봄 풍경은 세상에 다시 없을 마냥 아름다웠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2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인천의 공기에서는 익숙한 냄새가 났다. 반갑고 편안했다.


2014년 아내가 임신을 했다. 쌍둥이었다. 우리는 종종 낙산공원에 올라 북서울 야경을 내려다보곤 했다. 서울은 그 어느 도시 못지 않게 매력적인 정취를 뿜어냈다.


2014년 겨울에 뜻이 맞는 친구의 제의를 받아 Junior Leadership Program을 시작했다. 자료를 찾아 읽고, 프로그램을 짜고, 홍보물을 만들고, 학생들을 모집하는 모든 과정을 우리는 새로이 시작했다. 그리고 아마도 서로에게 평생 기억에 남을, 또는 그런 관계를 맺을 아이들을 만났다. 이 때의 아이들은 고작 고등학교 1,2학년이었다.


2014년이 끝나기 직전인 12월 22일, 두 쌍둥이가 태어났다. 나는 하늘과 바다의 의미를 넣어 아준, 하윤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당시 아이가 태어난 서울대 병원의 혜화역은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병원을 나서며 길가에서 들었던 캐롤송들이 귀를 울렸다. 대학로에는 눈이 내렸다. 나는 그렇게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2015년, 회사를 옮겼다. 최고의 엘리트 동료들과 밤샘의 나날을 보냈다. 힘들었고 재밌었고 많이 배웠다. 이직을 하는 와중에 이사를 했고, 쌍둥이를 보며 새로운 업무를 시작했고, 그 와중에도 Junior Leadership Program을 진행했다. 쌍둥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2016년 초, 현재의 회사에서 채용 제의를 받았다. 2013년부터 시작하여 이 회사에서의 채용 제의가 이번이 세 번째 였다. 내가 깊게 신뢰하는, 오랜 동료를 넘어서 가족 같은 이곳의 임원이 내게 직접 전화를 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장소는 부산이었다.


2016년 3월, 핀란드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왔다. 한 달 만에 아이들을 보러 춘천에 내려간 차에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그렇게 어머니의 유언을 듣지 못한 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마땅히 의지할 가족이 없는 아버지께는 작은 푸들 강아지를 입양시켜 드렸다. 아버님을 춘천에 홀로 두고 우리는 부산으로 내려왔다.


2016년 가을이 되어 아이들도 처가를 떠나 부산으로 내려왔다. 이제 우리 가족은 종종 해운대의 모래사장으로 나가 바다 끝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리고 그러는 새에 올해도 마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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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neinume